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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 잡아당기는 뜻이 ‘한라’

‘한라산은 주 남쪽 20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한라(漢拏)라고 말하는 것은 운한(銀河의 의미)을 라인(拏引: 끌어당김)할 만하기 때문이다. 혹은 두무악이라 하니 봉우리마다 평평하기 때문이요, 혹은 원산이라고 하니 높고 둥글기 때문이다. 그 산꼭대기에 큰 못이 있는데 사람이 떠들면 구름과 안개가 일어나서 지척을 분별할 수가 없다. 5월에도 눈이 있고 털옷을 입어야 한다.’
한라산은 은하수를 잡아당길 만한 높은 산이란 의미다. 해발 1,950m로 남한 최고봉이다. 예부터 부악釜嶽·원산圓山·진산鎭山·선산仙山·두무악頭無嶽·영주산瀛洲山·부라산浮羅山·혈망봉穴望峰·여장군女將軍 등 많은 이름으로 불려 왔다. 전설상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다. 두무악은 머리가 없는 산, 원산은 둥글게 생긴 산, 부악은 솥 같이 생긴 산이다. 모두 산의 형체를 본떠 명명한 것이다. 5월에도 눈이 있다고 할 정도니 천변만화하는 기상변화는 옛날부터 여전했든 듯하다.
고려 충렬왕 무렵 대략 1275~1308년 즈음 육지에서 제주로 들어와 여러 편의 시를 남긴 승려 혜일의 시에 ‘한라’란 명칭이 처음 등장한다. 그 이전에는 한라산이란 지명을 사용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제주란 지명도 고려 후기 처음 나타난다. <고려사>에 나온 제주 지명의 첫 기록이다. ‘고종 어느 해(1214~1224), 이 때 탐라(耽羅)를 고쳐 제주(濟州)라 하고 부사 및 판관을 두었다. 이 지방 풍속이 옛날에 밭 경계가 없어 강폭한 무리들이 날로 잠식하여 백성들이 괴로워했다.’
한라산을 영주산으로 칭한 것은 한라나 제주보다 훨씬 이후의 일이다. 진시황이 불로초를 찾으러 서복을 보냈다는 삼신산 중 하나인 영주산을 한라산으로 명명한 것은 시기상으로 맞지 않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 고적편에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중략) 한라산 동북쪽에 영주산(瀛洲山)이 있으므로 세상에서 탐라를 일컬어 동영주(東瀛洲)라 한다. (후략)’라고 나온다. 한라산을 영주산이라 명기한 최초 기록이다. 조선 중‧후기 들어 한라산이 유산록에 등장하면서 명산반열로 올라선 것으로 보인다. <탐라지> ‘김치의 유한라산기에 세상에서 말하는 영주산이 곧 한라산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후 이중환의 <택리지>(1751년) 등에 잇달아 등장한다.
조선 전기 지도에서는 제주도나 한라산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중기부터 한라산이란 이름으로 등장하다가 조선 후기 들어 <여지도> <팔도총도> <지도서> 등에 한라산 옆에 ‘영주’라고 조그맣게 병기돼 있다. 이로 볼 때 한라산이 삼신산 중의 하나인 영주산으로 불러진 것은 불과 300여 년 전쯤으로 추정된다.
한라산의 월별 방문객 추이를 볼 때 눈꽃과 상고대를 즐길 수 있는 겨울산의 성향을 뚜렷이 드러낸다. 2016년 기준 연중 탐방객은 1월이 12만 6,000명으로 가장 많다. 그래도 덕유산에는 훨씬 못 미치지만. 3월까지 탐방객이 8만 2,328명으로 여전히 많이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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