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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산행 버지니아 셰난도어 설국 속으로

07/18/2018 | 07:56:53PM
겨울 산행  버지니아 셰난도어 설국 속으로
Photo Credit: pickupimage.com
봄을 향해 흘러가던 세월의 끝자락에 매달린 겨울이 마지막 풍성한 눈을 선사했습니다. 봄으로 들어선다는 입춘도 지난 지 한 달, 봄비 촉촉하게 내린다는 우수도, 긴 동면에서 깨어나 세상만물이 살아 숨 쉼을 알리는 봄의 전령, 개구리가 겨울잠에서 깨어난다는 경칩도 지난 절기에 올 들어 가장 풍요로운 눈 잔치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셰난도어의 눈 소식이 전해진 날. 12명의 들뫼바다 수요산행팀 전사들이 목숨을 담보로 절경을 눈으로 확인하기 위하여 길을 나섰습니다.

제설차가 지나간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도 이내 쌓여버리는 눈. 그리고 결빙. 어떤 구간의 길은 유리면처럼 반들반들하여 운전하기에 여간 긴장되는 길이 아닙니다. 25마일 정도의 서행으로 셰난도어로 다가서는데 제법 잘 정비된 구간이라고 마음 놓고 10여마일 더 속력을 내다가 결국 차가 한 바퀴 돌아버리는 아주 놀라고 긴장된 순간도 맞이합니다. 갓길에 밀어놓은 눈들이 둔덕이 되어 다행하게도 여기에서 차가 멈춰 대형 사고를 모면하기도 했습니다. 놀란 가슴 쓸어내리며 더욱 속력을 낮춰 주행하니 평소보다 곱절이 넘게 시간이 소요됩니다. 혹자는 이런 날 산을 간다는 자체로 손사래를 저으며 제정신이냐고 나무랍니다. 혹자는 이렇게 드문 행운의 기회가 어디 있냐며 꿈에 부풀어 여장을 꾸리기도 합니다.

삶이란 접근하는 태도에 따라 근심거리이기도 즐길 거리이기도 하는 법. 인식의 전환이 따른다면 고난을 희열로 승화시킬 수 있음을 산에서 또 배웁니다.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즐기라 했습니다. 함박눈이 하염없이 내리는 211번 준 고속도로를 우리들만이 전세내서 가는 길. 셰난도어를 통째로 우리가 접수했었습니다. 선택받은 자들의 우월감에 도취되어 부푼 마음 겨우 가누며 그 마음부터 서녘 셰난도어로 먼저 보냅니다.

환한 미소들이 순백의 눈빛에 투영되니

스카이라인이 지쳐 잠시 내리막길을 내려와 계곡에서 쉬어가는 파노라마 방문자센터에서 애초에 산행을 시작하려 했으나 결빙된 비탈길이 자동차 바퀴만 헛돌게 할뿐 스노우타이어를 장착했는데도 불구하고 오르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하는 수 없이 공원 초입에 있는 Buck Ridge / Buck Hollow 트레일을 걷기위해 차를 돌려 내려와 주차장에 이르니 쌓인 눈과 치운 눈이 더 덮여있어 들어갔다가는 다시는 빠져나오지 못할듯 하여 인근 인색한 공간이 겨우 만들어진 갓길에 차를 주차하고 산행을 서두릅니다.

겨울 산행, 특히 오늘처럼 눈이 엄청나게 내려 쌓이는 날엔 필수로 갖춰야 할 장비. 아이젠과 스패츠입니다. 스파이크처럼 박아놓은 것을 신발에 덧씌워 미끄럼을 방지하고 발목을 감싸 등산화 속으로 눈이 침투되는 것을 막아주는 스패츠. 눈길 산행이 산뜻하고 즐겁게 만들어 주는 고마운 장비입니다. 계속 쏟아지는 눈이 녹아도 침투되지 않게 방수용 덧옷을 입으니 완벽한 채비를 갖추었습니다. 분주하게 오가던 차량들이 없는 지금 이 순간. 자연의 모습 그대로를 보고 있어 행복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산사람들의 투박하지만 환한 미소들이 순백의 눈빛에 투영되니 천진난만한 모습 그대로입니다. 눈을 뭉쳐 던지는 심술도 부려보기도 하고 금단의 구역을 몰래 범한 심정으로 그 증거를 남기기 위해 인증 샷을 날리는 이들. 귀에 익은 곡조의 동요를 흥얼거리는 이들... 평소 접하기 힘든 오늘 같이 수려한 설경과 조우하니 기쁨을 표현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입니다..

함께 어우러져 더불어 살아 하얀 바탕색 위에 뿌려진 원색의 다양한 군상들. 길게 이어지는 행렬이 옅은 수묵화에 색감을 입히니 그 한 폭 명화를 더욱 돋보이게 합니다. 눈 쌓인 겨울산은 현란한 색을 쓰지 않고 묵으로만 그린 수묵화에 가깝습니다. 저 멀리 보이는 능선의 나무들은 굵은 먹 붓으로 선을 그은 것이고 골짜기의 나무들은 가는 붓으로 점들을 찍은 듯합니다. 꽃과 잎으로 가리어졌던 산의 모습이 그대로 보이는 겨울 산. 길인지 물길인지 그냥 감으로 더듬으며 길을 가는데 개울 징검다리 바위 위에 곱게 쌓여진 눈들이 오늘 내린 눈의 높이를 가늠하게 해줍니다. 차마 부셔버리기에는 너무도 앙증스럽게 쌓여진 눈들. 소중한 것들을 귀히 여기는 마음을 배우며 삶이 더없이 풍요로워집니다.

설경에 취하고 바람에 몸을 맡기니 모두 무아지경에 빠져 그만 선두 길잡이가 꺾어져야 하는 Buck Ridge 트레일을 그냥 지나쳐 버렸습니다. 애초 계획은 가파른 이 길을 타고 올라 산등성을 걸으며 먼 산 먼 경치를 감상하고 계곡으로 이루어진 Buck Hollow를 타고 내려오는 루프(선회) 형식으로 돌기로 했었는데 차질이 생겼습니다. 물론 그것도 눈이, 자연이, 하늘이 허락해줘야 하는 길이지만 말입니다. 하는 수 없이 반대로 돌기로 하고 빠르게 지나치는 개울물과 연방 작별인사를 나누며 계곡 길을 해쳐 나갑니다. 깊게 쌓인 눈의 저항이 우리 일행들 발걸음을 늦추게 하는데 선두 패스파인더의 여성들을 배려한 사려 깊은 좁은 보폭의 발자국에 모두 그 위를 다시 밟으며 산을 오릅니다. 한사람이 디디면 발자국이 되고 여럿이 걸으면 마침내 길이 되어버리는 눈밭. 인류의 길들이 모두 그렇게 만들어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혼자만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어우러져 더불어 살아들 가나봅니다.

겨울산은 침묵의 산 겨울산은 침묵의 산입니다. 별 말이 없어도 가슴으로 주고받는 자연과의, 동행과의 언어가 있습니다. 인간사의 침묵은 견딜 수 없는 외로움이지만 자연의 침묵은 사람을 평화롭고 안정되게 하여 깊은 사념에 빠지게 합니다. 그래서 그 겨울 산행 길은 순례의 길이고 구도의 길입니다. 마치 눈보라처럼 몰아쳐 바람에 실려 날아오는 눈들. 시야가 흐려집니다. 계곡 산길에는 바람이 실어다준 눈들이 더욱 높이 쌓여 무릎까지 차오르고 어떤 구간에는 허리까지에도 이릅니다. 러셀(russell). 등산 용어로, 선두에 서서 높이 쌓인 눈을 쳐내어 길을 다지면서 나아가는 일을 말하는데 오늘은 그야말로 눈길을 개척해나가는 그 러셀을 경험해봅니다.

힘 좋은 댕기머리님이 내어놓은 길을 따라 오르는 눈길. 하늘에선 간단없이 함박눈이 여전히 쏟아지고 흰 옷 입은 나목들이 추워 떨며 울고 있는 산 풍경. 가슴을 따뜻하게 해주는 정인과 함께 걸어 더욱 정감이 이는 산행. 선두가 지치면 다른 동료들이 교대로 앞서 길을 내면서 정으로 엮어진 눈 속 산행을 기쁨으로 이어갑니다. 이고 서있는 우리들 머리 위 낮은 하늘에서는 바람이 세차게 몰아치고 처연하게도 그 세찬 바람에 휘어가는 나목들. 나무들이 모두 바람 불어가는 그 방향으로 누웠습니다. 겸허함을 잊고 때로는 자연 앞에서 혹은 세상사에서 맹목으로 맞서려는 인간들. 때론 바람 앞에서 수그릴 줄도 알고 숙명 앞에서 포기할 줄도 아는 나무들의 지혜를 배울 일입니다. 사랑이라고 세상에 외치고 싶은 순간

“십 분간, 무자비한 휴식” 이라는 반가운 외침에 치친 몸을 가누며 배낭을 벗고 이마에 맺힌 땀들을 닦아내며 더욱 낮게 내린 하늘을 쳐다봅니다.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산인지 경계가 허물어진 묘한 연결에서 결국은 인간도 자연도 모두 하나로 이어짐을 느끼며 내가 곧 자연이며 자연 또한 우리라는 일체감을 느끼게 합니다. 한 순배 돌리는 포도주 한잔이 짜릿한 전율로 내장을 휘돌다 내려가니 몸도 마음도 주변 자연도 모두 평화와 그윽한 안식의 심연으로 빠져드는 듯합니다. 조금 남은 와인으로 그 희디흰 눈 위에 사랑의 표식 하트를 그려봅니다. 극명하게 대비되는 색이 더욱 강렬하게 돋보이는데 굳이 어느 특정인이 아니더라도 이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 이 순간, 모두를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은 이 넉넉함, 감히 사랑이라고 세상에 외치고 싶은 순간입니다. 모든 허물과 온갖 잘못을 덮어주는 오늘 같이 내린 이 넘치는 눈들을 보면서 이들을 닮고 싶은 심사입니다.

순백의 황홀경을 선사한 설국 눈길 산행은 체력의 소모가 빨리옵니다. 눈이 주는 저항을 감내하며 걷는 작업은 평소보다 몇 곱절의 체력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애당초 스카이라인 까지 진군하리라던 계획은 한갓 꿈으로 스러지고 안전을 위해 귀환을 하기로 했습니다. 이미 하체에 힘이 풀린 여성회원들의 쓰러짐이 빈번해지고 가쁜 숨을 고르는 선두들의 노고가 안쓰러운데 부지 간에 빼어난 설경에 취해 걷다보니 어느새 두 시간을 넘게 보낸 것이었습니다. 깊은 눈 때문에 돌아 내려가는 길도 녹녹치 않을 듯합니다.

모든 등산의 낙상 사고는 거의 십중팔구 하산 때 생기는 것을 감안한다면 더욱 조심해야할 귀환 길입니다. 겨울산은 아름답지만 위험합니다. 낮은 산도 눈에 덮여있으면 결코 낮아보이지가 않습니다. 아름다움과 두려움의 경계, 그 사이를 오가며 긴장감으로 산을 오르내리는 것도 겨울산행에서 느끼는 독특한 매력입니다. 그래도 눈에 모두 담아 가기에도 벅찬 절경들을 원 없이 봤으니 설사 이 눈 위를 나뒹굴며 간다 해도 아쉬울 것 없었습니다. 일상에서 벗어나면 항상 마음 설레는 일탈의 그 묘한 보상심리. 봄이 오는 길목에서 맞이한 폭설은 차마 보내기 힘든 아쉬운 작별을 하고 보낸 이가 전혀 예기치 않았던 사정에 의해 다시 되돌아 왔을 때 그 느닷없는 출현에 기쁨으로 소스라쳐 놀라던 그 느낌처럼 반갑기만 합니다. 자연이란 화판에 눈으로 쓱쓱 지워버린 겨울 산에 넉넉하게 채운 저 여백. 바쁘게 하산하다 문득 뒤돌아보면 길은 다시 눈에 덮여버리고 아득한 은빛 천지만.. 쌓인 눈 툭툭 털고 섰는 꽁꽁 얼어붙은 나뭇가지 끝에는 어느새 평소보다 이르게 어둠이 내립니다.

겨울 설산이 너무 그리웠던 우리 들뫼바다 산객들의 고요 속에 이어지던 행렬. 아무도 밟지 않은 순수의 땅을 디뎠다는 자부심과 그 오묘한 마음의 정화를 얻으며 자연이 주는 위대한 선물을 마음껏 누린 하루. 순백의 황홀경을 선사한 설국 속에서 잊혀져가던 동심과 빛바랜 서정을 일깨우며 오르내린 명 산행이었습니다. 차창을 스치는 굴뚝마다 장작불을 지핀 연기들 아스라이 피어오르는 산촌에는 어둠을 밝히려는 불빛들이 하나둘 켜지며 아직도 포근하게 내리는 눈 속에서 온가족이 단란하게 보내던 유년의 추억을 끄집어내게 하는 아늑한 겨울 정경을 고스란히 그려내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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