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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과 바람이 빚은 한 잔, 낭만까지 더해주니 홀린듯 호로록

04/11/2017 | 09:43:59AM
햇살과 바람이 빚은 한 잔, 낭만까지 더해주니 홀린듯 호로록
닷새간 캘리포니아 와인 기행

영화 '사이드웨이(Sideways)'는 술꾼에겐 꿈같은 스토리다. 중년이 되었으나 내세울 것 하나 없는 두 남자가 캘리포니아로 1주일간 와인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 지난달 27일 샌프란시스코로 날아갈 때는 몰랐다. 진탕 취하는 닷새가 될 줄이야.

캘리포니아는 미세먼지 없이 화창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남쪽으로 2시간 달려 도착한 몬터레이. '분노의 포도' '에덴의 동쪽'을 쓴 존 스타인벡의 소설로 유명한 곳이다. 바닷가 마을 카멜바이더시(Carmel-by-the-Sea)는 이탈리아나 스페인 어느 도시에 들어온 느낌이다. 날씨에 홀려 산책마저 감미롭다. 포도 열매를 만드는 그 햇살과 바람이다. 여행지로 유명한 몬터레이 해변과 17마일 드라이브, 페블 비치의 일몰도 아름답다. 취할 일만 남았다.

이튿날 카멜로드 테이스팅 하우스를 방문했다. 눈앞에 배리모어(피노 그리지오), 로제(피노 누아), 카멜로드 몬터레이(피노 누아), 카멜로드(리즐링) 등 7가지 와인이 놓였다. 색깔과 투명도를 살피고, 잔에 코를 넣어 향을 맡고, 잔을 흔들어준다. 산소가 들어가야 맛과 향이 배가된다. 와인을 입안에 머금고 당도·산도·질감을 음미하며 삼킬 때 목구멍과 식도에 전달되는 뒷맛도 가늠해 보았다. 뒤로 갈수록 진하고 강하고 깊어졌다. 이렇게 연이어 마시는 시음을 '비행(flight)'이라고 부른다.

와인 취향은 사람마다 다르다. 한국인은 4명 중 3명(75%)이 카베르네 소비뇽을 찾는다고 한다. 두 번째로 사랑받는 와인은 샤르도네. 마신 경험이나 습관, 대세 추종주의와도 얽혀 있다. 이번 와인 투어는 주인공이 전혀 달랐다. '낯설겠지만 좋은 와인이 있는데 마셔볼래?'라는 질문과 같았다.

피노 누아(Pinot Noir). 와인에도 성별이 있다면 이 품종은 여성이다. 그중에서도 몬터레이에서 생산된 카멜로드 몬터레이 피노 누아는 특별하다. 국내에도 시판됐다.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의 호평 때문에 더 궁금했다.

몬터레이에서 차로 40분을 달려 카멜로드 와이너리에 도착했다. 400에이커(49만평) 농장에 피노 누아만을 재배하고 있다. 피노는 껍질이 얇아서 습도와 열에 아주 민감하다. 이곳 피노가 유명한 것은 태평양에서 부는 밤바람이 포도알을 식혀주기 때문이다. 포도 수확은 9~11월에 하는데 열매는 작지만 밀도가 높아 단단하고 묵직하다. 와이너리 매니저 웬디 해먼드는 "오전에 태평양에서 안개가 들어오고 한낮에 물러간다"며 "기후와 바람, 토질이 피노를 재배하기에 최적의 환경"이라고 말했다. 발효를 위한 오크통은 프랑스에서 가져와 7~9년을 쓴 다음 위스키 양조에 재활용된다. 포도알을 따먹는 새들을 쫓기 위해 매 10마리를 훈련시키는 방식도 흥미로웠다.

사흘째 일정은 캘리포니아 북쪽 끝에 자리잡은 소노마 카운티의 샌타로자에서 펼쳐졌다. 유명한 켄달 잭슨 와인센터에서 22종의 포도 품종과 아로마를 확인한 뒤 와인과 음식의 페어링(짝짓기)을 경험했다. 소비뇽 블랑에는 꿀과 오렌지를 넣고 구운 아몬드와 치즈, 샤르도네에는 크랩 케이크, 피노 누아는 크리스피 버섯과 찰떡 궁합이었다. 현지에서 설명한 와인 교육자 페드로 러스크는 "와인 취향을 보면 사람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다"고 했다. 과거에 와인 전문점을 운영했다는 그는 세 가지 질문으로 고객의 마음을 읽곤 했단다. 어떤 와인을 좋아하냐? 왜? 예산은 얼마냐?

포도는 지하 10m 아래까지 뿌리를 뻗어 수분과 영양분을 먹고 자란다. 그만큼 토질이 중요하다. 서늘한 기후대를 좋아하는 피노 누아는 섬세하고 예민해 재배가 어려운 품종이다. 캘리포니아 일부 해변 지역에서만 소량 생산되고 놀랍고도 복잡한 풍미를 낸다. 뒷맛은 깔끔하다. 러스크는 "피노는 드라이하고 부드러운 질감에 꽃향이 난다"며 "땅속 깊은 지구의 맛을 느낄 수 있다"고 했다.

나흘째 드디어 나파 밸리로 넘어갔다.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샌 파블로 만(灣)에서 발생하는 안개의 영향으로 낮에는 따뜻하고 밤에는 선선해 포도원이 400여곳에 이른다. 1976년 '파리의 심판'으로 유명한 프리마크 아비에서 시음을 했다. 미국 와이너리 중 유일하게 화이트 와인과 레드 와인이 모두 좋은 평가를 받은 곳이다.

그날 저녁은 좀 더 많이 마셨다. 일몰 시각은 7시 32분. 소노마 카운티 토박이인 운전기사 데이비드는 밤길에 운전대를 잡은 채 말했다. "수확철에는 나파 밸리 전체에 포도 냄새가 진동한다"고. 향기에 다들 취하는 셈이다.

영화 '사이드웨이'에서 피노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마일즈(폴 지아마티)는 이유를 묻자 이렇게 답한다. "카베르네와는 달리 아무 환경에서나 못 자라서 끊임없이 보살펴줘야 하죠. 시간과 공을 들여야 포도알이 굵어지고 그렇게 잘 영글면 그 맛과 오묘한 향이 태곳적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줘요." 이 영화를 보고 와인의 삶을 찬미하게 됐다. 포도는 거친 토양에서 자라고 양조를 거쳐 숙성되지만 따는 시기에 따라 맛은 변화무쌍하다. 최고의 순간을 뽐내고는 삶을 마감한다. 인생과 닮아 있다.

돌아오는 기내에서 자다 깼다. 모니터에는 목적지까지 남은 거리 7654㎞라고 찍혀 있었다. '영원히 끝나지 말았으면 하는 여행이 있다'는 말을 실감했다.

시차: 한국이 16시간 빠르다.

축제: 몬터레이에서는 해마다 4월 중순에 와인 축제가 열린다. 카멜바이더시에서는 가을에 모래성 쌓기 대회가 열린다.

주요 여행지: 카멜로드 테이스팅 룸: Lincoln between Ocean and 6th, 카멜바이더시, 831-624-1036

카멜로드 와이너리: 37300 Doud Road, 솔레다드, 831-678-5700

켄달 잭슨 와인센터: 5007 Fulton Road, 풀턴, 707-571-8100

프리마크 아비 와이너리: 3022 St Helena Hwy North, 세인트헬레나, 707-302-3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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