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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겨울, 고흥엔 … '피굴'

02/28/2017 | 09:59:54AM
이 겨울, 고흥엔 … '피굴'
뽀얗게 투명한 국물에 담긴 굴 알맹이들이 통통했다.

숟가락으로 국물과 굴을 떠서 입에 넣었다. 국물은 시원했고, 굴은 달았다.

동동 뜬 참깨와 김이 고소함을 더하였고, 송송 썬 쪽파는 산뜻하게 끝맛을 잡아주었다.

이 낯선 음식의 이름은 ‘피굴’. 한겨울 전남 고흥에서 즐겨 먹는 별미이다. 고흥에 오지 않고서는 맛보기는커녕 보기도 어려운 독특한 향토 음식이다.

◇고흥 '남성굴'을 아시나요

피굴은 굴이 흔하고 맛난 고흥이 아니면 탄생할 수 없었을 음식이다. 우리나라에서 굴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건 경남 통영이다.

국내에서 유통되는 굴 대부분이 통영에서 양식된다. 그런데 소비자들은 잘 모르지만, 시장에서 통영굴보다 더 높은 가격에 거래되는 굴이 있다.

'남성굴'이다. 고흥 남성리에서 나는 굴이라 하여 통용되는 이름이다. 비싸게 쳐주는 건 그만큼 품질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남성리에 있는 '여흥수산' 작업장에 가보았다. 아낙 40여명이 이곳에서 '쪼시개'라고 부르는 낫처럼 생긴 전용 도구로 손이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르고 민첩하게 굴을 껍질에서 분리해내고 있었다.

갓 까낸 굴을 맛봤다. 진짜 우유처럼 달고 고소했다. 흔히 굴을 '바다의 우유'라고 한다. 너무 진부한 표현이라 생각했었다. 남성굴을 먹어보니 그렇지 않았다. 매우 정확했다.

고흥은 원래 굴이 많이 나던 곳이다. 그만큼 굴이 생장하기 알맞은 자연환경을 지녔다. 근대적 굴 양식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곳도 고흥이다.

음식 칼럼니스트 박정배씨는 "일제 강점기에 발간된 여러 자료들을 보면, 우리나라에서 굴 양식은 1887년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면서 "3대 굴 양식장으로 고흥 해창만과 함남 영흥만·황어포를 꼽았는데, 이 중 제일은 고흥이라고 했다"고 말했다.

당시 굴 양식법은 바다 갯벌에 둔덕을 만들고 거기에 돌이나 패각(조개껍데기)과 굴을 뿌리고 2년 뒤 채취하는 방식이었다.

이를 '휴립패각살법(畦立貝殼撒法)'이라 한다. 지금도 고흥 우도 앞바다에서 이 방식대로 굴을 생산하는데, 자연산 굴과 같은 맛이 난다.

요즘 통영 등 전국 대부분 지역에서는 '수하식'이라고 해서, 굴이 다닥다닥 붙은 기다란 줄을 바다 속에 늘어뜨려 키운다. 1958년 개발됐다.

굴이 하루 24시간 바닷물에서 양분을 섭취해 더 빨리 자라고 자연 더 많은 수확이 가능하다. 남성굴도 수하식으로 양식한다.

남성리 서중원(70) 이장은 "남성리에서 굴 양식은 50여 년 전 시작됐다"고 했다. "옛날에는 요즘처럼 생굴을 대량 판매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굴을 말려서 유통하거나 보관했죠. 집집마다 큰 솥을 걸어놓고 거기에 일단 굴을 삶아요. 그런 다음 굴을 건져서 햇볕과 바람에 일주일 이상 말립니다. 요즘 건홍합과 비슷합니다.

이렇게 말린 굴은 쫀득하니 그냥 먹어도 맛있고, 기름장에 찍어 먹어도 맛있어요. 요즘도 우리 동네에서는 굴 철이 끝날 무렵이면 굴을 말려서 먹지요."

고흥 사람들은 생굴도 참기름에 소금을 섞은 기름장에 즐겨 먹는다. 초고추장이나 간장에 찍어 먹는 건 봤어도 기름장은 고흥 말고는 본 적이 없다.

그런데 기름장에 찍어 먹으니 이게 별미다. 굴이 가지고 있는 달큰한 감칠맛이 고소한 참기름과 의외로 잘 어울렸고, 소금은 굴 자체의 맛을 가리지 않고 정직하게 드러내 주었다.

◇손 많이 가는 피굴 요리 과정

굴이 워낙 흔하다 보니 고흥의 겨울 밥상에는 굴을 온갖 음식에 다 쓴다. 생굴은 물론이고 김치에도 굴, 된장국에도 굴, 심지어 고사리나물에도 굴이 들어간다.

고흥의 다양한 굴 음식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은 게 ‘피굴’이다. 겨울철 고흥의 차례상이나 잔칫상에서 빠지지 않는 음식으로, 과거에는 웬만한 식당이면 피굴을 으레 냈지만 요즘은 손이 많이 가 미리 부탁하지 않으면 맛보기 어렵다.

피굴 만드는 법을 고흥 두원면 ‘다미식당’에서 보았다. 한순이(56) 사장은 미리 껍데기를 깨끗하게 씻어놓은 굴을 보여줬다.

“껍데기째 삶아야 돼요. 그래서 (껍질) 피(皮) 자를 붙여서 피굴인가 봐요. 그러지 않으면 피굴 특유의 맛이 나지 않아요. 껍데기에서도 맛이 나오는가 봐요.”

커다란 솥에 약간의 물과 함께 굴을 넣고 20분 정도 삶는다. 굴 알맹이와 껍데기에서 우러난 국물이 바닥에 고인다.

국물은 따로 받아두고 굴은 알맹이를 까낸다. 한참 두어 미세한 이물질이 가라앉게 한 국물만을 다시 솥에 붓고 팔팔 끓인다. 끓인 국물을 굴 알맹이에 붓고, 따라내고, 가라앉힌다.

이 과정을 두세 차례 반복한다. 그러면 뽀얗고 맑은 국물이 완성된다. 이 국물을 차갑게 식혀 굴 알맹이와 함께 그릇에 담고 참깨와 김 가루, 쪽파를 띄우면 피굴이 완성된다.

피굴 한 숟갈을 다시 떠서 입에 넣었다. 앞으로는 피굴 한 모금 먹지 않고 겨울을 넘기면 섭섭할 것 같다.

피굴 맛보려면: 고흥 웬만한 식당 주인은 다 만들 줄 알지만, 미리 준비해두지 않으니 주문할 때 피굴을 해달라고 부탁해야 한다.

과거 전라도에서 백반만 시켜도 서울의 한정식처럼 나와 놀랐다. 고흥에는 아직도 이런 풍요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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