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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에 약한 프랑스 언론

06/28/2011 | 10:06:48AM
한국에서 대통령이 자기 아들을 1년에 조(兆) 단위 예산을 주무르는 공기업 회장에 임명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좌·우 스펙트럼을 막론하고 모든 언론으로부터 몰매를 맞지 않을까? 2009년 10월 프랑스에서 비슷한 일이 있었다.

사르코지 대통령이 20대 초반인 아들을 대기업 본사들이 대거 입주해 있는 파리 근교 상업지구인 라데팡스 개발공사 이사장에 앉히려 했다. 지방의회 의원인 아들의 정치적 기반을 강화해 주려는 의도였다. 그런데 이를 두고 '족벌(族閥) 정치'라며 비판하고 나선 것은 프랑스가 아니라 영국 언론이었다. 사르코지는 프랑스 언론까지 점차 비판에 가세하자, 마지못해 이 카드를 거둬들였다.

권력에 약한 프랑스 언론의 속성을 보여주는 사례는 또 있다. 작년 8월 세계 1위 화장품 회사 로레알의 베탕쿠르 회장이 2007년 대선에서 사르코지와 집권당(UMP)에 불법 정치자금을 줬다는 내부자 고발이 있었다. 엄청난 탐사보도감이었지만, 프랑스 언론은 끈질기게 파고드는 근성을 보여주지 않았다. 사르코지 대통령은 관영매체인 프랑스텔레비전2(TF2) 뉴스 시간에 등장, 앵커와 1대1로 문답을 나누면서 "돈 받은 적이 없다"고 해명하는 선에서 사건을 봉합했다. 만약 한국에서 대통령이 대선 때 재벌의 선거자금을 받았다는 폭로가 나왔는데 KBS 뉴스에 등장해 "그런 적 없다"고 말하는 것으로 해명 노력을 다했다고 주장한다면 우리 언론이나 국민이 이를 납득할까?

스트로스칸 IMF 총재의 성폭행 미수 사건을 계기로 프랑스 언론의 이런 보도 관행이 비판의 도마에 오르고 있다. 권력자의 난잡한 사생활을 알면서도 눈감아 온 자기검열 관행이 이번 스트로스칸 사태로 이어졌다는 비판이다. 권력자는 어디에서나 주변에 아첨꾼이 들끓어 부패하기 싶다. 언론의 비판이 없으면 그가 검은 유혹을 이겨내기는 힘들다.

프랑스 기자를 만났을 때 "프랑스 신문은 팩트 취재에 게으른 것 같다"고 싫은 소리를 하면 "우리는 팩트(사실) 보도보다 팩트를 어떻게 볼 것인지 시각을 제시하는 것을 더 중시한다"고 응수한다. 프랑스 언론은 또 정치인이나 연예인의 비리(非理)와 사생활을 캐는 영·미 언론의 행태를 '천박하다'고 비판해왔다. 개인의 인권과 자유는 존중받아야 하고, 같은 맥락에서 공인의 사생활도 보호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하지만 스트로스칸 사건 이후 프랑스 언론이 일제히 권력자의 성추문 보도를 쏟아내고 있는 걸 보면 지금까지의 관행은 핑계에 불과했다는 생각마저 든다.

프랑스 언론의 권력 눈치 보기는 취약한 재무구조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프랑스 주요 일간지들은 이념의 좌·우를 막론하고 정부로부터 매년 수백억원의 보조금을 받고 있다. 재정을 정부 예산에 의존하는 미디어가 권력에 비판적이길 기대하기는 어렵다. 르 몽드 디플로마티크의 전문기자 세르주 알리미는 '새로운 충견(忠犬)들'이란 책에서 "기자들이 점점 더 순종적으로 변해가고, 뉴스는 점점 더 빈약해지고 있다"면서 기자들의 각성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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